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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23
어떤 죽음과 어떤 움직임

돼지 축사에서 분뇨를 치우던 노동자가 사망했다고 한다. 보통 축사 분뇨 청소는 기계로 작업하지만, 기계가 고장 났다며 (마스크 같은 최소한의 안전장치도 쥐여주지 않은 채) 직접 분뇨청소를 하도록 했다고 한다. 먼저 들어간 노동자가 쓰러지자 이를 보고 들어간 다른 노동자도 쓰러졌다고 한다. 그렇게 한 달새 4명의 중국, 태국, 네팔인 이주노동자가 사망했다. 한국인 농장주는 처음엔 위험한 줄 몰랐다며 진중하게 사과했으나 얼마 뒤, 말을 바꿔 책임을 이주노동자들에게로 돌렸다. 짧은 단상 같은 기사 몇개를 보고 후속기사를 기다렸으나 찾을 수 없었다. 사람이 죽었는데 이 사건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한채 지나갔다. 그러고 보니 몇 년 전에도 그랬다. 비닐하우스에 거의 감금되다시피 하며 착취당하는 이주노동자들의 노동환경을 JTBC에서 보도했고[2] 내용이 충격적이라 친구들과 이야기 해보려 했지만 아무도 몰랐다. JTBC니까 다들 알 줄 알았는데... 그러고 보니 그것도 처음이 아니었다. 2004년엔 불법체류자 단속을 위해 그물총을 도입하기도 했다. 최근에야 알게된 사실이다.

18일엔 '우리 네팔 청년의집'에서 진행하는 펀딩이 무산되었다.[3] 인종차별을 직시하고 '네팔문화의날' 행사를 개최하기 위한 펀딩이었다. 경향에 기사가 났다.[4] 악플은 각오했지만 이주노동자를 고용하고 있는 업체나 농장주들이 무섭게 달려들어 협박을 하니 불이익이 올까 어쩔 수 없었다고 한다. '고용허가제'가 존재하는 한, 그들의 협박은 그저 말뿐일 것이라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어떤 죽음이 무시당하고 어떤 움직임은 시작도 전에 좌절되었다. 차별은 핑계만 달리할 뿐, 꽤나 닮은 얼굴을 하고 있다. 긴시간동안 싸워온 사람들도, 이주 노조 합법화 같은 승리의 이야기도 존재한다. 아직도 학교에서 '단일민족'을 가르치는지 모르겠다만, 이미 한국사회는 다른 길로 걷기 시작한지 오래다. 당연히 모른척한다고 바뀌는 건 없다. 우리에겐 더 많은, 더 다양한 이야기가 필요하다.


[1]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99615
[2] http://news.jtbc.joins.com/article/article.aspx?news_id=NB10724705
[3] https://twitter.com/nepalwithsafe/status/865160829749952512
[4]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05081517001

# 그 외 by @sceneryoftoday
2016.12.28
작가성을 지운 이미지는 실용적인가?

시각 이미지를 생산하는 젊은 작업자들이 모여 기획한 사진 전시/판매 플랫폼 '더 스크랩'[1]에 다녀왔다. 매대가 있는 방으로 들어설 때 가장 감각적으로 와닿은 것은 음악가 박다함이 선곡한 올해의 음악이었다. 처음 들어보는 사운드는 신선하고 활력이 넘쳤다. 장내에 있는 사람들이 한 손에 체크 리스트를 든 채 이미지를 살펴보며 천천히 이동하고 있었다.

전시 공간과 판매용 설치 공간의 디자인이 서로 참조하는 디스플레이 형식은 낯설지 않다. 그것보다는 사진들이 나열되어 있는 상태가 내게는 다소 새로웠다. 이 마켓이 삼은 원칙에 따라 어느 작가의 사진이든 A4 크기로 맞추고 작가의 이름을 지웠으며 데이터 용량의 오름차순으로 배열했다. 작가의 이름을 지움으로써 그의 작업적인 경향을 지시하는 기호가 가려졌고, 이미지 프레임의 크기를 규격화해 이미지의 내용과 형식의 긴장 또는 결속 관계가 와해되었다. 전시의 성격처럼 출품 사진가의 ‘작가적 위상과 작업의 독해’를 전제했다면 잘못된 방식이겠지만, 예술 창작물을 사고 판매하기 용이하도록 한 장치로서는 효율적이었다.
이는 참가 작가들 간에 작용하는 경력과 위상 차이도 제거해주었다. 언론 매체나 작가의 사진집 또는 작가의 트위터 계정 등으로 이미지를 보게된 관객은 작가가 누구인지 알거나 유추할 수 있었겠지만 말이다.

작업의 생산 배경과 메시지라는 추상적인 암호가 제거된 이미지를 그럼 어떻게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 트위터에서 검색한 후기나 주변 사람들의 소감을 들어보니, 이 이미지들은 돈과 교환되어 소비자 본인의 취향을 확인하는 매개물로 기능한 듯 보인다. 구매자는 작가의 작업 경향 혹은 현대 사진의 경향을 기준으로 작업의 가치를 내세우기보다, 구매자 자신의 가치 기준에 따라 선택하는 모습을 보였다. 어떤 인상을 좋아하든 이미지에 대한 패티쉬, 혹은 액자에 담아 공간에 걸어두는 실용성에 따라 구입할 필요가 생길 수 있고, 그럴 수 있도록 행사장에는 액자 프레임 상담 부스도 마련돼있었다. 어떤 관객은 이미 알고 있는 작가를 후원하는 장치로 이 행사를 활용했다.

나는 평소와 같이 전시의 시각적인 형태만 보고 전시로 오인했지만, 사진 사이를 돌아다니며 작업의 결과물에 가정된 ‘메시지'를 읽고 저자성을 상상하고 그것과 대화하는 행위를 여기서는 작동시킬 필요가 없다는 걸 알았다. 때문에 자신의 언어로 독해하고 싶은 욕망이 들어서는 순간도 없었다. 복면으로 가려진 작가의 얼굴을 알고 싶으면 할당된 수만큼 해당 사진을 구입해야 했다. 작가의 스테이트먼트를 얻는 방법이 적어도 이 장에서 그뿐이라니 저항감이 들었다. 만약 그 작가를 다른 공간이나 전시에서 다시 만날 수 없다면 그 상황은 어떤 문제를 암시하는 걸까. 작가의 사진을 예술 작업으로 마주하는 공간이 시장 '바깥'에 없다면 이것은 생산 제도의 어떤 문제를 가리키는 걸까?



[1] http://the-scrap.com

# 그 외 by @gusvjar
2016.11.26
우리는 평화-해요

“경찰을 때리기보다 꽃을 붙여주니 우리 입장에서는 훨씬 낫다”

11월 26일 제5차 촛불 집회에서 경찰차 벽에 시민들이 붙인 스티커를 두고 이철성 경찰청장이 한 말이다. [1] 단편적인 인용이긴 하지만, 저 말의 기본 전제는 '경찰'의 입장에서, 스스로를 방어하고 옹호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경찰과 맞대응하는 시민, 당신은 그것을 어떻게 독해해야 할까? '때린다'는 행위는 물리적인 충돌을 일으킨다는 점에서 '폭력 행위'라는 이미지를 불러낸다. 그러나 우리는 그 행위자가 어떤 사회정치적 위계에 놓이는지에 따라 '폭력'은 정당한 방어 내지는 메시지를 표출하는 강력하고 또 유일한 수행(퍼포먼스)이 된다는 것을 안다. 현상으로만 보았을 땐 사적인 개인간의 충돌처럼 보이더라도, 그 개인들에게 배분된 권력의 크기에 따라, 권력을 갖고 있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 사이에서 후자가 기득권을 전복할 수 있는 투쟁의 수단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꽃 스티커 부착을 제안한 이강훈 작가는 경찰차 벽에 스티커를 붙임으로써 '경찰차 벽'이 불법으로 우리, 시민들의 자율적인 동선과 반경을 가로막고 있다는 걸 알리고 싶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러한 수행에 대해 경찰청장은 '우리 입장에서는 때리는 것보다 훨씬 낫다', 말하자면 '맞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소감'을 밝혔다. 공권력의 수장인 '경찰청장'이 아니라 신체의 자유를 지닌 한 사람으로서 말한 격이나 다름 없다. 누군들 맞는 걸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말이다. 그렇게 말함으로써 이 경찰청장 남성은 핵심적인 사실을 가렸다. 경찰 권력 체계 안에서 그가 발화하고 있다는 것, 그가 대표하는 상징 권력, 다시 말해 그 자신의 위치가 '시민권력'의 우위에서 억압하고 있는 경찰 권력, 행정 권력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니, 그 자리에 있지 않은, 그 자리와 정당한 대칭축을 이뤄야 하는 시민이라면 그의 말에 감격하거나 동조하는 것은 잘못된 논리다.

'평화'를 갈망하고 있다. 모두가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그 '평화'라는 것이 우리가 한 번도 보지 못한 어떤 것이라면, 궁극적인 것에 도달하기에 앞서 시행착오는 당연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무엇인가는 '유사 평화' 즉, 평화처럼 보이는 어떤 것일 수도 있다는 의문을 끊임없이 제기할 수 있다면 좋겠다. 그래야만 '평화'의 원리를, 실천을 상상하고 시도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다양한 시위? 좋다. 그러나 그것이 지금 우리를 둘러싼, 우리가 그 질서에 속해 있는 정치 체제를 적시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평화? 좋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이전에 죽음의 문턱을 넘은 이들에게 빚진 시간 위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그들을 위해 발명해야 할 어떤 것임을 잊어선 안 된다. '평화'란 타자의 죽음에 따른 후속 사건이어야 함을 잊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1] http://news.heraldcorp.com/view.php?ud=20161126000128

# 그 외 by @gusvjar
2016.10.28
사랑하는 이들이 살아남기 위해서

더욱 좋은 세상을 위한 발걸음은 모두 여성들이 먼저 내딛는 것 같다. 최근 이화여대 법학 전문 대학원생들로 이루어진 소모임 ‘풀하우스’가 ‘파트너 등록법’ 입법 촉구를 위한 캠페인을 시작했다. [1] 파트너 등록법은 “현대사회의 더 넓어진 가족형태를 인정하고, 그들의 권리와 의무를 법적으로 규정하는 것”을 목적으로 두고 있으며 “혈연 또한 혼인 외의 사유로 발생하는 새로운 형태의 가족 관계의 성립과 효력 및 그 등록 등에 관한 사항을 규정한 법”이다. [2] 기대 수명이 (반은 농담이지만) 끔찍하리만큼 늘어난 21세기에서 누구와 삶을 함께하는가를 선택하는 것은 누구나 행복을 위해 누려야 할 가장 기본적인 권리이지만 누군가의 선택들은 법적으로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기존의 가족관에서 벗어난 파트너등록법을 통해선 아직 법제화되지 않은 성소수자 커플의 파트너십이나 비혼주의자 공동체 역시 법적으로 인정, 보장받을 수 있다.

아는 레즈비언 누나는 벌써 2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애인과 동거를 하고 있다. 하지만 애인의 건강문제 탓에 긴 시간 동안 입원을 해야 하는 동안 누나는 옆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플 때 입원 절차조차 밟게 할 수 없는, 고작 ‘동거인’으로써 애인의 곁에 머무는 동안 누나는 무척이나 괴로워했다. 그녀가 사랑하는 이와 함께하면서도 겪은 고통을 나라고 겪지 않을 수 있을까?

새로운 시대에는 그에 걸맞은 제도가 필요하다. 여전히 많은 사람이 ‘파트너 등록법’과 같은 새로운 제도는 전통적인 삶의 많은 가치를 파괴할 것이라고 반발하고 나선다. 하지만 이 과정은 그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리 과격하지 않다. 우린 기존의 제도 모든 것에 안녕을 고하는 것이 아닌, 그저 새로운 시대에 걸맞게 기존의 제도를 조금씩 바꿔나가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당신들이 그 낡은 것들을 붙잡고 있는 동안에도 누군가의 삶은 피딱지처럼 말라가고 있다. 파트너 등록법은 단순히 성소수자만을 위한 것이 아닌,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한 제도일 것이다.


[1] https://twitter.com/_rexion/status/791861814388633601
[2] ‘풀하우스’ 소개 http://blog.naver.com/team_fullhouse/220771304249
[3] 현재 ‘풀하우스’에서는 파트너 등록법 입법 촉구를 위한 지지서명을 받고 있다. https://twitter.com/femi_booksalon/status/795965581270786048

# 그 외 by @louderaloud
2016.10.22
앞으로 ‘어쨋든’ ‘그냥’ 지나치치 않기를 다짐하며

강남역 포스트잇에 적힌 익명의 메시지들을 바라보던 지난 5월, 익명의 피해자가 문득 궁금했었다. 가해자도 꿈이 있는 신학도였다던데, 이번 피해자는 아무것도 알려진 바가 없었다. 궁금증을 안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어쨌든' 이 세상에 어떤 틈이 만들어졌다고 생각했다.

오 개월 후, 그 틈새로 익명의 피해자들이 경험담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막연히 우연히 살아 남았다 생각했던 나는 이번 피해자들의 증언을 읽어내려가며 비로소 나 역시 그들 중 하나라는 사실을 확실히 확인할 수 있었다. 어째서 ‘어쨋든’이라며 쉽게 넘겼을까. 사소했던, 수많은 불쾌한 경험도 함께 떠올랐다. 어째서 그때 ‘그냥’ 참고 웃어 넘겼을까.

가해자 중 한 사람은 나에게 보낸 메일의 첫 줄에 이렇게 적었다. “인아씨, 아시겠지만 제게 좋지 않은 일이 생겼습니다.” 여전히 대부분 사람들은 지금 이 고백들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혜택을 누리던 사람들은 더욱이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에겐 그저 좋지 않은 일이 생긴 것뿐이다. 강남역살인사건이 내 옆자리 남성이 얼마나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지 어렴풋이 깨닫는 계기였다면 이번 고백들을 통해 내 옆자리의 그들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묵인했는지 깨닫게 되었다. 이런 곳에서 얼마나 더 발버둥을 칠 수 있을까. 그런다고 뭐가 달라질까. 지금 너무 쉽게 희망을 말하는 것도 기만이다.

와중에 호주에 있는 대학 동기가 메신저로 말을 걸었다. 최순실 뉴스를 본 것이다. 그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000_내_성폭력 이야기도 흘러나왔다. 나의 이야기에 최초로, 정확한 지점에서 공감하여 이야기를 들어주던 그는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최근 호주정부는 쿼터제를 도입해 지원금의 50%를 여성에게 지급하는 제도를 마련했다. 뉴스를 더 찾아보니 ‘스크린오스트레일리아'라는 영화협회에서는 영화 내 여성 서사와 창작자의 기회 부족을 지적하며 이를 위해 40억 원을 창작 지원금과 커리어 지원금으로 마련했다고 한다.[1] '호주 정부 국가혁신 과학 아젠다'에서는 STEM(과학, 기술, 엔지니어링, 수학)계열의 여성 부족을 지적하며 5년간 113억 원을 지원한다.[2]

이미 이어지는 고발들만큼 여러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발 빠른 개인들의 노력도 눈에 띄었다. 그럼에도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아무것에도 만족할 수 없었다. 사회적 안전망이 없는 상태에서 개인들의 노력은 종종 무색해지고, 쉽게 소멸한다. 이미 개인들의 정신과 육체를 갈아 넣으며 겨우 유지되는 이곳에서 개인들의 노력을 보며 희망을 찾는 건, 허무하다. 무엇보다도 아무도 책임을 지거나 처벌을 받은 사람이 없다. 그래도 지금 여기, 분명 변화는 일어나고 있다. 위태로운 변화의 발걸음이 힘을 받을 수 있도록 필요한 건 제도적 장치라는 생각뿐이다. 호주제를 폐지하는데 걸린 시간 48년. 우리는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을까?


[1] 스크린 오스트레일리아 Gender Matters 정책 홍보영상
[2] http://www.innovation.gov.au/page/opportunities-women-stem
[3] 영국 여성전용 창업자금 지원 공모
[4] 영국 영화계 공공지원금의 반을 여성에게 지급하도록 하는 쿼터제 마련 촉구
[5] 스웨덴 정부웹페이지 양성평등 현황자료

# 그 외 by @sceneryoftoday
2016.10.09
남산예술센터 개념기반극 (2) - <변칙판타지>

지난달 보았던 <아방가르드 신파극>에 이어 남산예술센터의 두 번째 개념기반극인 <변칙판타지>(정은영 작. 연출)을 보았다. 이래저래 기대가 많았던 극이었다. 일단 게이 코러스 집단인 지보이스와 함께 잊힌 여성국극을 다시 소환한다는 극의 소개가 마음에 들었다. 여성국극이라는 용어가 생소해 찾아보니 여성국극이란 오로지 여성 연기자들로만 구성된 극을 말한다. 1948년에 박녹주, 김소희, 박귀희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여성국악동호회에서 한국 최초의 여성국극인 <옥중화>를 공연하지만, 그보다는 이듬해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를 개작해 올린 <해님 달님>이 큰 인기를 끌게 되며 여성국극이 큰 인기를 끌게 되었다고 한다.

<변칙판타지>는 2000년대 초 여성국극의 부활을 선언했던 <춘향전>을 우연히 보게 된 N이 주인공을 맡고 있다. N은 여성국극의 매력에 빠져 직접 선생님을 찾아가 가르침을 청하고 여성국극 배우로서의 길을 걷는다. 하지만 현실은 냉정하게도 이미 잊힌 여성국극을 위한 자리는 없었다. 그렇게 10년이라는 세월이 지났고 여전히 N은 여성국극을 꿈꾼다. <변칙판타지>는 설 곳이 없던 그녀가 그동안 꿈꿔왔던 자신의 무대를 꿰어 만든 극이다. 그녀는 지보이스와 함께 ‘성’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남자다움과 여자다움은 무엇인가? 젠더는 어떻게 학습되는가? 과연 타고난 성별이 이를 결정하는가? 여성으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남성 역할을 연기하는 배우인 N과 남성으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보다 ‘여성스러운’ 지보이스는 분명 우리 사회에서 ‘변칙적인’ 존재들일 것이다. 이들은 학습된 ‘성’에서 자유로운, 진정으로 자신들이 즐거워할 수 있는 무대라는 공통된 공간에 목말라있다. 이런 그들의 만남의 끝엔 그토록 꿈꿔왔던 그들의 ‘판타지’가 실현되는 쇼가 펼쳐진다.

하지만 모두가 크로스드레싱을 즐기며 신나게 노래하고 춤추는 희망찬 엔딩으로 향하는 이 ‘변칙’들의 소란은 이제 너무 낡아 보인다. 극의 전반부는 여성국극에 대한 정보 전달과 무대가 없어 여성국극을 소개할 수 없었던 자신의 힘겨웠던 삶을 단순히 나열하는 데에만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탓에 무척 지루하며 젠더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시작되는 후반부의 성 역할 바꾸기 놀이도 신선하게 다가오진 않는다. 물론 “여성적인 것이란 과연 무엇일까요?”라는 질문이 여전히 유효한 세상이라지만, 적어도 이 극에 관심을 갖고 직접 찾아 볼 생각까지 하는 관객들은 흔한 게이 영화의 클리셰처럼 끝나는 한 편의 드랙쇼 그 이상의 것을 기대했을 것이다. 극이 끝나고 나면 다시 혐오의 구렁텅이로 돌아가야 하는 나는 이 안일한 ‘장밋빛 소동’을 마냥 즐거워만 할 수 없었다.


https://twitter.com/nsartscenter/status/783886289225392128

# 그 외 by @louderaloud
2016.09.12
지진은 한국 사회를 흔들 수 있을까?

12일, 경주에서 진도 5.8의 지진이 발생했다. 원자력 발전소가 밀집된 지역이라 덜컥 겁이 났으나 곧 피해는 없다고 뉴스가 떴다. 그러다가 몇몇 학교가 야자를 하던 학생들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한 사실이 SNS를 통해 퍼져나갔다. 사람들은 '각자도생'을 도모한 학생들을 칭찬했다. 피해가 없기는커녕 일주일쯤 지나자 100억 원 가량의 피해가 발생했다는 뉴스가 떴다. 지진 때문에 연착한 KTX를 미처 피하지 못한 직원 둘이 사망했다는 뉴스도 있었다. 국민안전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고 박근혜 대통령은 9일 후 눈에 익은 그 노란색 점퍼를 입고 경주를 방문했다. 잊지 않겠노라고 약속했는데 잊고 싶어도 잊을 수도 없다.

2014년 4월엔 노란 리본 이미지가 SNS를 뒤덮었다. 비전문가들이 만든 이미지다 보니 모양도 가지각색이어서 끝이 리본 형태로 되어 있으면 안 된다는 둥 잡음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번에는 노란 도쿄도방재책자 한국어판 이미지가 여기저기서 눈에 띄었다. 이 책은 일본 도쿄종합방재부의 방대한 전문지식을 토대로 일본의 전문광고사 덴츠가 아이부터 어른까지, 단시간은 물론 긴 시간을 두고 읽을 수 있도록 세심하게 디자인한 책이다. 세심함의 연장선상에서 도쿄에 사는 외국인들을 고려해 만든 한국어판이 SNS를 통해 퍼져나간 것이다. 혹자는 도쿄와 한국의 상황이 다르다고 꼬집지만 나는 그저 이 아름다운 정보디자인이 한국 SNS에서 퍼져나가는 것이 신선했고 웃펐다. 얼마 후 각 정부관계처 SNS에 올라온 한국식 (배달의 민족 서체로 글자를 한가득 넣은 못생긴)'카드뉴스'를 보니 더욱더.

19일 일주일 만에 또 진도 4.5 규모의 지진이 일어났다. 이번에는 야자를 강요한 학교도 없었으며 각자 습득한 지식으로 시민들은 차분하게 대피했다고 한다. 세월호가 침몰해서 바뀐거라곤 고작 '각자도생'을 칭찬하는 모습 뿐이라면 너무 절망적이다. 지진은 한국 사회를 흔들 수 있을까? 부디 소 잃었으면 외양간 좀 고쳤으면 좋겠다.


도쿄도방재책자

# 그 외 by @sceneryoftoday
2016.09.11
남산예술센터 개념기반극 (1) - <아방가르드 신파극>

남산예술센터가 하반기 시즌 프로그램으로 새로운 방식의 연극을 모색하는 개념 기반 연극 3편을 연달아 올린다. 그 중 첫 번째로 9월 7일부터 11일까지 오른 극은 다페르튜토 스튜디오와 공동 제작한 적극 작 <아방가르드 신파극>이다. [1]

<아방가르드 신파극>은 ‘새로운 물결’이라는 본래의 뜻과 달리 오해받고 있는 ‘신파’를 다시 그 원류로 되돌리려는 시도이다. ‘신파’는 본래 17세기 말 민권운동이 시작과 함께 양식화 된 ‘구파’에 해당되는 가부키 극에 대항하며 나타났다. 하지만 오늘날 ‘신파’는 진부한 방식으로 관객의 눈물을 짜내는 데에만 혈안이 된 드라마를 뜻하고 있다.

극은 멜로드라마 장르의 중요한 작품인 1914년 작 무성 영화인 <폴린의 위기>를 기반으로 시작하여 4차 가부키-장광설, 3차 가부키-조루리(인형을 활용한 극), 2차 가부키-노오 가면극(미소년극)을 지나, 어쩌면 아마도 신파의 원류일지도 모르는 고대의 종교의식처럼 보이는 1차 가부키-오쿠니 가부키(무용극)로 넘어간다. 이 신파 찾기의 과정은 “시를 쓰기 위해선 모든 시를 외우고 그것을 다시 모조리 까먹은 후 써야한다”고 극 중간에 삽입된 일화처럼, 신파극에 대한 개념을 천천히 복기하며 전부 해체하고 잃어버리는 과정처럼 보인다. 이 과정 사이사이엔 보르헤스의 단편이 조각처럼 끼어들고, 결국 신파극의 발달 과정에서 형성되고 굳어지며 고리타분해진 기본적인 구조들을 모조리 잃어버린 연극은 (말이나 단어가 아닌) 웅얼거림에 가까운 태초의 목소리로 이루어진 어떠한 몸짓 혹은 몸부림에 가깝다.

‘아방가르드’라는 단어가 주는 무거운 난해함이 극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극의 뜻을 온전히 알긴 힘들어도 극 자체는 대중적으로도 재미있으며 객석에서 꽤 많은 웃음이 중간 중간 터져 나왔다. 나는 이런 실험극들이 보다 많은 관객들을 만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아방가르드 연극에 대한 개념을 몰라도 의외로 즐거운 경험이 될 것이다.


[1] http://www.nsartscenter.or.kr/Home/Perf/PerfDetail.aspx?IdPerf=1075

# 그 외 by @louderaloud
2016.09.01
제2, 제3의 ‘디자인소호’를 각오하며.

디자인소호는 최근 성추행 피해자를 다시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고 한다. 이번에는 피해자가 남긴 유서를 문제 삼았다.[1] 몇 달 전 이 사건이 처음 알려졌을 때, 당연히 분노했다. 나도 여성이고, 디자이너이며 편집디자인 회사에 다녔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 되지 않아 잊혔던 이 사건은 Stronger Together가 정리한 사건 개요를 접하게 되면서[2] 나에게 조금 더 바싹 다가왔다. 무엇보다도 대표와의 문자 내용이 가장 결정적이었는데, 그 정도 폭언은 나에게도 낯선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디자인소호가 이름이 있는 회사라길래 검색을 해봤더니 잡플래닛에 올라온 리뷰들이 눈에 띄었다. 그곳에 쓰인 내용 또한 전혀 낯설지가 않았다.

"상식이 통할 듯 통하지 않는 회사로 체력의 바닥을 체험할 수 있음"

"맡는 일이 많고, 그에 비해 대우받는다는 느낌이 별로 안 듬. 금방 그만두는 사람이 정말 많다. 고위직과 직원들 사이가 안좋음"

"퇴사율이 높은회사. 대외적으로 이미지 관리를 많이 하지만 실상 직원들은 굉장히 답답함을 많이느끼고 실망을 많이 하는편.."[3]

사건은 작은 에피소드의 집합이다. 비상식적인 사건에 대한 책임을 한 사람에게만 지울 수 없다. 강남사건 역시 '정신병자'가 우발적으로 저지른 일로 쉽게 재단해서는 안되는 것처럼 말이다. 사건을 둘러싼 공기는 사건을 더욱 악화시킨다. 와중에 피해자는 더욱 고립되고, 2차 3차 피해를 입는다. 실제로 이 사건을 내가 '심도있게' 알기 바라는 몇몇 사람들로부터 디자인소호를 감싸거나 피해자에게 모든 책임을 씌우는듯한 말을 직접 들었다. 혹여 어떤이는 "그 회사, 대표가 원래 이상한 걸로 유명했다"라는 말로 편리하게 이 일을 넘겨버리기도 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으면서도 제2, 제3의 디자인소호를 각오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2, 제3의 디자인소호를 각오하기 위해서는 일단 이번 부당해고 피해자가 '좋은 선례'가 되어야 한다. 싸움에 지더라도, 이런 종류의 싸움에 기꺼이 힘이 되어줄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남겨야 한다. 이번 사건의 피해자를 돕기 위한 모금이 진행되고 있다.[4] '좋은 선례'를 만들기 위해, 계속 사건의 경과를 지켜봐 주길, 또 각자의 자리에서 기꺼이 도움이 되어주길 부탁한다.


[1] https://twitter.com/Unfair0602/status/771269281136775168
[2] http://upforus.blogspot.kr/?m=1
[3] http://goo.gl/rdktQ9
[4] 피해자 후원하기

# 그 외 by @sceneryoftoday
2016.08.28
숲속으로 돌아간 "21세기 제너레이션?"

8월 28일 허핑턴포스트 코리아의 21세기 제너레이션 기획 2편 <서울을 떠나 숲에서 전기, 가스, 수도 없이 맨몸으로 사는 부부를 만났다(인터뷰)>가 발행되었다. 인터뷰의 주인공은 숲에서 전기, 가스 없이 사는 젊은 부부였다. 트위터 타임라인에는 비난이 쇄도했다. 처음은 전기나 가스를 안쓰고 "나무를 해다 쓰는 것"은 오히려 산림을 파괴한다거나 하는, 인터뷰 내용에 대한 비판들이 올라왔지만 한나절 지나서는 부모들의 백신 거부가 공공보건에 끼치는 해악에 대한 이슈로 넘어가 '야만'에 대한 비판으로 번져나가고 있었다.

나는 이전에 TV에서 이 부부의 이야기를 본 적이 있다. 프레임은 비슷했다. "이런 대안적인 삶은 어떨까요?" 류의. 부부의 삶에는 별 유감이 없다. 다들 저 좋을 대로 살 일이니까. 그런데, 대안적 삶의 모델, 그것도 젊고, 새로운 모델로 제시하는 언론의 무책임함에 대해서는 깊이 유감스럽다. 새롭지도 않거니와 주류화될 수 없는 삶의 모델이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소재라 여겼다면 다른 관점에서 다룰 수도 있었다. 예컨대 이 부부는 숲에 기거하며 경제생활과 사회생활의 상당 부분은 여전히 서울의 관계에 의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SNS로 소통하고, 서울의 플리마켓에서 수공예품을 판다) 숲, 농촌에서의 삶과 서울의 삶이 어떻게 공생할 수 있을지 질문하거나 이들의 삶의 양식을 한 극으로 참조해 다운시프트의 수준을 단계별로 설정해볼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좀 유용했을 것 같다. 아무튼 숲이나 해외가 '헬조선'에 대한 답이 될 수는 없다. 청년의 삶에 대해서라면 특히나 더 그렇다. 도심을 빼앗기고도 청년들은 온·오프라인 여기저기서 북적이며 사건들을 만들어나가고 있는데, 언론과 정치권이 여기에나 더 많은 관심을 둬 주었으면좋겠다. 미래로 이어지는 현재는 여기에 있다.


기사 : 서울을 떠나 숲에서 전기, 가스, 수도 없이 맨몸으로 사는 부부를 만났다

# 그 외 by @slowcoleslaw
2016.02.24
마이국회텔레비전, 필리버스터

정의화 국회의장과 새누리당이 직권상정으로 테러방지법을 통과시키려 하자 야당은 47년만에 필리버스터, 무제한 토론에 돌입했다. 고 김대중 대통령이 마지막으로 했고, 새누리당이 만든 선진화법으로 부활할 수 있었다던 이 사건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방식의 새로운 정치 문화를 만들어냈다. 유투브 채널 생중계는 채팅과 함께 참여하며 감상할 수 있었고 실시간으로 주요 내용이 정리되어 아카이브 되었다. 별풍선 대신 지지를 보낼 수 있는 의원들의 후원 계좌가 SNS를 통해 빠르게 퍼져 나갔다. 다양한 짤과 2차창작물이 등장했다. 빈 의정석과 대비되는 빽빽한 방청석 또한 처음 보는 것이었다. 세상엔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던 젊은 정치인, 전문성으로 무장한 똑똑한 정치인, 사이다를 쏟아내는 여성 정치인이 나타났고, 썩고 한심하게만 보였던 늙은 정치인들은 뜻밖의 아재(매)력을 과시하며 자신들만의 '진정성'을 설득력있게 호소했다. 아, 무엇보다도 힐러리라는 캐릭터가 등장했다. 그렇게 필리버스터가 진행되는 동안 여의도는 그 어느 곳보다도 가까웠다. 그러나 10일까지 계속할 수 있다고 장담하던, 그리고 그렇게만 보였던 필리버스터를 마무리 짓는다는 소식이 3월 1일 공식 기사화 되었다. 견고해 보였던 새 시대는 신기루처럼 사라졌고 여의도는 다시 멀어졌다. 그러나 설령 신기루처럼 허무하게 사라졌다 해도 23일부터 1일까지의 근 일주일은 실제했다. 새로운 가능성은 언제든 다시 출몰할 기회를 노리고 있다.


여의도 국회의사당(국회TV와 팩트티비 유투브 채널을 통해 생중계) / 참여의원 (순서별) 김광진 문병호 은수미 박원석 유승희 최민희 김제남 신경민 강기정 김경협 서기호 김현 김용익 배재정 전순옥 추미애 정청래 진선미 최규성 오제세 박혜자 권은희 이학영 홍종학 서영교 최원식 홍익표 (3월 1일 이후)이언주 전정희 임수경 안민석 김기준 김관영 박영선 주승용 정진후 심상정 이종걸

# 그 외 by @sceneryoftoday
2016.01.16
넷플릭스, “라면 먹고 갈래?”

2015년 12월 13일 뉴욕타임스는 2015년 최고의 TV쇼 10개를 꼽아 소개했다. 한창 ‹Parks and Recreation›을 보고 있을 때라 자연스레 아지즈 안사리(Aziz Ansari)가 출연하고 제작한 ‘넷플릭스 시리즈’인 ‹Master of None›이 눈에 들어왔다. 넷플릭스 웹에 가면 볼 수 있을까 생각하고 웹페이지를 찾았다. 그곳엔 “아직 한국은 아직 서비스하지 않는다”는 안내문이 굴림체로 죽은 채 떠 있었다. 2015년 1월 16일, 넷플릭스 한국이 정식 론칭했다. 엉망진창 붓으로 쓴 ‘넷플릭스’ 광고 영상을 시작으로 “라면 먹고 갈래?”의 미국 버전이라는 “Netflix and chill?”이라는 유행어가 소개되었고 많은 사람이 신문물에 대한 찬양과 간증을 남겼다. 넷플릭스의 한국 서비스 론칭은 과거 아이폰 출시와 비슷한 인상을 풍긴다. 넷플릭스로 접한 2011, 2013년 영국 채널 4의 ‘블랙미러’는 너무 쩌는 시리즈라 중2 시절 ‘라르크-앙-시엘’의 가사를 보고 받았던 충격급의 충격을 받았다. 티브이를 켜지 않는 날이 늘어 가고 있다.


https://www.netflix.com/kr/

# 그 외 by @sceneryofto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