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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31
<<오큘로>> 5호, <문지기의 임무> 칼럼에 부치며

이번 <<오큘로>> 5호에 실린 이도훈 씨의 글(<문지기의 임무 : 동시대 한국의 시네마테크와 영화제 프로그래밍에 대하여>)은 시작부터 “건설적인 비판에 인색한 문화는 진보보다는 퇴행을 더 앞당길것”이라고 밝히며 씨네필들 사이에서 어떤 성역처럼 여겨지는 지난 시네마테크와 영화제들의 다소 안일한 길만을 선택했던 프로그래밍을 비판한다. 서울아트시네마, 부산의 영화의전당과 한국영상자료원을 중심으로 한 국내 시네마테크의 프로그램들에 대해선 지나치게 이미 검증된 ‘정전’과 친구들(이라 불리는 영화계 내-외부의 명사들)의 ‘취향’에 기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으며, “이미 포화 상태에 이르렀”고 그 분위기마저 “과열되어 있”는 상태에 놓인 많은 국내 영화제들에 대해선 더는 “다른 곳에서 보기 힘든 영화를 상영하는 곳이 아니라 다른 영화제에서 보기 힘든 영화를 상영하는 곳”으로 전락했다고 비판한다. 본디 영화제 프로그래밍이 담당해야 할 매년 조금씩 확장하는 영화라는 매체를 어떻게 감각해야 하는가에 대한 새로운 화두를 던지기보단, 영화제끼리의 과열된 경쟁 과정에서 다른 영화제보다 더 많은 관객을 유치하기 위해 해외에서 검증받은 작품들에 관용어를 붙여 “영화제용 영화의 생산과 수용”을 반복하는 데 그치거나, 그저 양적으로만 작품의 수를 늘리는 게으른 프로그램을 선보인다는 것이다.

한 번쯤 생각해봐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가끔은 내게도 이미 검증된 ‘걸작들’로 점칠 된 시네마테크와 영화제들은 그 ‘유명한’ 영화들을 스크린으로 (먼저) 볼 수 있다는 도취된 감정으로만 작동하는 장소처럼 보이기도 한다. 더불어 우리는 굳이 시네마테크나 영화제를 시간 들여 가지 않더라도 MUBI나 Fandor, 넷플릭스와 같은 스트리밍 사이트 등을 통해 집 안에서 나만의 수준 높은 영화제를 개최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1] 이제 그들은 가상 속 영화제들과의 경쟁에서도 살아남아야 하는 것이다.

물론 프로그래머들에게 모든 책임을 온전히 전가하고 싶진 않다. 많은 관객이 검증되지 않은 새로운 영화에 대해선 일단 미심쩍어하고 보기 때문이다. ‘이마무라 쇼헤이 특별전’과 같은 검증된 작품들을 상영하는 프로그램들의 관객 수와 ‘베니스 인 서울’이나 최근의 ‘흑해영화제’와 같이 아직 검증되지 않은 동시대 영화들을 상영하는 프로그램들의 관객 수는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 이는 단순히 새롭고 좋은 영화를 트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그 영화들에 대해 관객들이 주목할 수 있게 하는 지면이 부재한다는 사실을 알려주기도 한다. 하지만 비관적으로만 바라보기엔 최근 ‘시네마테크 영화학교’와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직접 관객과 함께 이 시대의 새로운 정전을 찾아보려는 시네마테크 측의 노력도 눈에 띈다. 우리에겐 우리 시대의 영화가, 그리고 그에 맞는 새로운 흐름의 영화 담론이 필요하다. <<오큘로>>에서도 지적하듯, "영화의 담론은 닫히고 고정될 때가 아니라 열리고 흐를 수 있을 때 그 가치가 더 빛나기" 때문이다.


[1] 특히 30일 동안 30여 가지의 다른 영화들을 스트리밍 상영해주는 MUBI의 경우, 소위 ‘정전’으로 불리는 영화들부터 해외 영화제에서 방금 프리미어를 마친 동시대 영화들은 물론 아방가르드한 실험 영화나 에세이-다큐멘터리 영화 등 정말 폭넓은 스펙트럼의 영화들을 서비스로 제공한다. 물론 아직 국내에선 정식 서비스가 출시되지 않았기 때문에 해당 사이트의 상영작들을 영자막으로만 관람할 수 있다는 단점이 존재한다. https://mubi.com
오큘로 5호 http://www.okulo.kr/2017/08/okulo-005.html

# 독립출판 by @louderaloud
2016.12.15
동행동의 «뜰채01»

표지를 열면 "사용 설명서"가 적혀있다. “볕이 잘 드는 자리에서 읽어”야 하는 이 책을 비행기 안에서 읽었다. 다행히 창으로 있는 그대로 볕이 들었고, 이 정도면 이 책의 “사용 설명서”에 충실한 듯 싶었다. “[제품명] 뜰채, [제품의 특장점] 외따로 가라앉았던 이야기를 건져 올렸습니다. 한데 모아서 엮었습니다.” 목차는 “먹다, 일하다, 아프다, 지내다”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의 카테고리에 “동행동”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의 글이 실려있다. “동행동은 여성으로 사는 삶을 함께 기록하는 모임”이라고 한다.

그래서 동행동은 서로에게 “안전한 공간”,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공간”이다. 이 공간에서 사람들은 서로 “먹고 사는 이야기”를 한다. 자신의 삶을 마주하고, 돌아보는 기록들은 삶에서 공백으로 남아있거나, 생각 없이 지나쳤던 부분들, 웃어넘겨야 했던 부분을, 사회에서 억지스럽게 여성성을 강요했던 부분을 차근히 되짚어 준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먹고 사는” 행위는 단지 “먹고 사는" 것에서 멈추지 않는다. 단순하면서, 필수적이기에 구체성을 잃었던, “먹고 사는” 행위에 묘사가 덧붙여지면서, “이야기”가 되고, “이야기”들은 각자의 삶을 다시 “행동”하게 만든다. ‘삶→이야기→삶→이야기→…’로 이어지는 구조/모임은, 각자 삶의 균형을 잡아주는 동시에 서로에게 최소한의 안전망이 되어 주는 것처럼 보였다.

“아주 죽지 않아 줘서, 나는 결국 이 기록이 여섯 사람이 잘 버티며 살아 온 이야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진심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아직' 죽지 않은 것도 아니고 ‘아주’ 죽지 않았다고 되어있다. 이 말은 곧,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던 이들이 그럼에도 버티며 삶을 이어나갔음을 서로가 “아주 죽지”않게 버팀목이 되어주었음을 말해준다. 뜰채01 마지막에서 람은 “어떻게 살고 싶은지 계속 얘기해야지”다짐한다. 동행동은 글쓰기가 자신들의 “삶을 ( )하는 행동이 되길 바”란다고 한다. 여성들의 이야기가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구체적이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결국 이 이야기로 여성들의 삶이 조금 더 나아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또 구체적인 여성들의 이야기가 듣고 싶다. 솔직히 ‘좋겠다.’와 ‘그리고’ 사이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이야기해야 할지 아직 잘 모르겠다. 삶이 이야기가 되었고, 이 이야기는 또 삶이 된다. 여기서 각자 균형을 잡아나간다. 비행기가 착륙한다. 아직 잘 모르지 않는다.


https://twitter.com/WEBZINE_mugu/status/795601791068958720

# 독립출판 by @oneroom_twt
2016.06.20
오큘로 2호 – ‘먼지’로서의 이미지

미디어버스에서 발간하는 영상비평 계간지인 <<오큘로>>의 2호가 나왔다. <<오큘로>> 2호는 “오늘날의 많은 영상에는 서사와 무관하거나 지속적인 몰입을 요구하지 않는 (중략) 먼지처럼 미세한 이미지들”을 특집으로 다뤘다. ‘먼지’로써 존재하는 이미지들은 그 어떤 방식의 내러티브의 맥락과도 관계없이 돌출하거나 존재하지만 어떤 중요한 함의도 담아내지 않기 때문에 독해가 불가능에 가까우며, 때론 비평에서도 다뤄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 먼지들은 미세하지만 분명히 영화 내에서 존재하며 내러티브의 표면 위로 가라앉거나, 때론 그것을 덮어버린다. 고다르가 발표하는 근래의 영화들이나 벤 리버스, 라야 마틴, 리산드로 알론소 등 한 없이 댈 수 있는 이름들과 영화들은 ‘먼지’를 어떻게 읽어내느냐가 더욱 중요해진다.

문제는 필름 시대의 먼지 이미지와 디지털 시대의 먼지 이미지가 서로 다른 층위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필름 시대에 먼지 이미지로만 이루어진 앤디 워홀의 <엠파이어>는 이것이 극장에서 상영 된다는 것만으로도 미학적인 혁명이었다. 하지만 디지털 시대에서 영화는 그 무게를 잃어버린 채 비물질로써 표류한다. <<오큘로>>의 첫 글인 <먼지와 기념비 사이의 ‘콘텐츠’ : 오디오비주얼 이미지의 진동>에서는 디지털 시대의 변화된 영상-보기 시대를 짚어내며 콘텐츠로 변모한 디지털 영상들은 “먼지와 기념비 사이”를 부유한다고 말한다. 이 지점에서 보자면 진 영블러드의 “흐름의 차원에서의 영화”를 글 속에서 인용하고 있는 것은 꽤 흥미롭다. 액체로써 존재하는 디지털 영화들은 이제 기체로써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http://www.okulo.kr/2016/06/okulo-002.html

# 독립출판 by @louderaloud
2016.05.20
언제나 ‘세컨드’, ‘납작한 여자’.

퍼스트가 아닌, 언제나 ‘세컨드’의 위치에 머무르던 영화 속 여성 캐릭터들을 탐구 영역의 전면에 내세운 잡지 «세컨드» 1호 ‘납작한 여자’가 발간되었다. 그동안 남성들에 의한 서사 속에서 지워졌거나 가려지고 잊혔던 ‘여성’들은 사실 영화 속 캐릭터들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최초로 극영화를 만들었던 여성 감독 알리스 기-블라쉐의 이름은 영화사에서 지워지고 그 자리는 뤼미에르, 멜리아스, 그리피스 등으로 메워졌다. 첫 번째 ‘스타 배우’였던 플로렌스 로렌스는 배우로 살아온 그 오랜 기간 동안 자신의 이름이 삭제된 채, 자신이 활동했던 영화사의 이름을 딴 ‘바이오그래피 걸’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었다. 고다르나 트뤼포로 대표되는 누벨바그의 시작엔 여성 감독이였던 아네스 바르다가 있었다.

«세컨드»의 경우 이러한 가려진 여성들에 대한 논의를 비교적 근 시간대에 개봉한 영화 속 여성 캐릭터들로 국한시킨 모양이다. 잡지의 에디토리얼에서 밝혔듯이 그들은 “전형화되어 별다른 고민 없이 만들어지고 익숙하게 소비되는 여성 캐릭터들에 대해 ‘납작한 여자’라 명명하고 문제제기”를 한다. 그동안 페미니즘 비평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를 전면에 내세운 잡지의 등장이 무척 반갑기만 하다. 다만 잡지 전반이 긴 지면을 소모하며 같은 문제를 반복하며 제기하는 데만 그치고 있다는 느낌이 아쉽다.

반면 피처로 실린 ‹천만 영화 호황 속 가난한 여성 캐릭터에 대하여›는 꽤 재밌게 읽었다. “여성들은 매력적인 남성 캐릭터가 나오는 영화를 절대적으로 선호한다”며 여성 캐릭터의 기근 원인을 여성 관객 탓으로 돌리는 제작사 대표의 말에 대해 반론하며 필자가 원인으로 지적하는 것은 변화하며 다각화하는 관객들의 요구에 비해 기존 흥행 영화들의 공식을 단순 반복하는 데 그치는 제작 형태이다. 사실 남성 캐릭터를 섹슈얼하게 소비하는 ‘브로맨스 코드’가 흥행의 큰 요소로 자리 잡은 현 영화 시장에서 제작사 대표의 말은 어찌 보면 거짓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는 영화 속 재현의 장에서 사라진 여성들이 오히려 시장에서 적극적인 소비자로서 자신의 위치를 만들고 있는 것에 가깝다.[1] 그로 인해 쏟아지는 '브로맨스'의 세계 속에서 여성 관객들은 이제 질식 직전에 놓였다. 지쳐버린 그들은 모두 한목소리로 ‘좋은 여성 캐릭터’를 보고 싶다고 말하고 있다. 영화 역시 자본의 논리 속에서 돌아가는 산업이기 때문에 여성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우는 것이 부담스럽다는 그들에겐 페미니즘 역시 돈이 된다는 사실을 주지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


[1] 아주 오래전 최보은 평론가는 100% 수컷 정서를 뽐내는 영화 ‹친구›에 매혹되었다고 밝히며 “자신이 수컷을 좋아할 뿐 아니라, 나아가서 수컷들의 세계를 동경하기까지 한다”고 밝혔던 적이 있다. 여성 역시 거대 집단으로 자리 잡을 수 있게 연대를 이루자는 취지를 담은 글의 말미에 “박근혜가 대통령에 출마한다면 그를 찍을 작정이다”라는 문장 때문에 그해 가장 큰 논란을 가져온 글이 되었지만.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1426
https://tumblbug.com/secondfilmmagazine

# 독립출판 by @louderaloud
2016.04.01
공원일기와 공원기록

2016년 4월 1일 남그린은 자신의 책 «공원일기»(2015)와 EZSUP의 책 «GREEN NOTE 공원기록»(2016)의 닮음을 지적하는 글을 게시했다. 그에 따르면 두 책은 레이아웃・폰트 사용을 비롯한 전반적인 디자인의 측면에서,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의 문단 구조・단어 등에서 살필 수 있는 텍스트의 측면에서 “너무도 비슷”하다. 덧붙이는 글에서 남그린은 EZSUP과 주고받은 메세지를 게재했다. EZSUP은 남그린의 문제 제기―“제작물 자체”를 두고 봤을 때의 “지나친 유사성 혹은 참고 이상”이라는 의견에 대하여 자신의 제작 컨셉을 설명하며 “텍스트 참고 및 인용은 없”었고 “외려 우연하지만 취향과 스타일이 비슷한 사람이 있어 공감했었”다고 답했다. 이에 남그린은 자신의 입장을 다시 한번 견지하고는 독자에게 판단을 맡기며 더는 일언 첨부하지 않을 생각이라고 글을 마무리했다. 나는 두 책 모두 직접 보지 못한 삼자로 역시 한마디 보태지 않을 생각이다. 남그린의 게시물만 봐서는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어떤 판단을 내리기 불가능하다는 쪽이 맞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 ‘시비’에서 아무것도 읽지 않을 생각은 없다. (사실 관계가 어떻든) 이미 판매가 완료된 소규모 출판물에 대한 스스로의 책임을 공공연히 언급하는 일은 자신이 만든 세계와 그곳을 디뎌 간 이들에 대한 예우임이 분명하다.


https://twitter.com/nam_green/status/704608771515949056

# 독립출판 by @modusleep
2016.03.16
‘종이’ 시사주간지 «워커스» 창간

‘꿘’에서 볼 수 없었던 모습을 한 «워커스»가 창간됐다. 이건 흡사 TK지역 새누리당 지지하는 부모님에게 노동당을 전도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워커스» 창간 소식은 반갑기만 했다. 시간이 흘러 어렵게 구한 «워커스»의 첫인상은 합리적이고 영리했다. 사진가들이 사진을 전담하고 기사와 분리해 (좋은 사진은커녕 좋은 해상도의 사진을 구하면 다행인) 여건을 극복했고, 주간지의 짧은 호흡을 고려해 네 팀의 디자이너가 돌아가며 맡는다. 디자인도 맥락을 생각하면 신선했다.[1] 사진과 디자인이 주는 기대감을 안고 찬찬히 기사를 읽기 시작했다. 그러자 가장 큰 약점이 드러났다. 편집이다. 굳이 종이로 나와야 하는지 의심스러운 질과 양의 기사들이 이어졌다. 호흡도 너무 짧고 내용도 얕았다. 특히 첫 호 첫 기획특집은 삼류 찌라시에나 나올 법한, 아니 인터넷 게시판 한구석에서나 우연히 발견할 법한 내용이었다. 이건희를 찾아 삼성병원에 세 번이나 갔다가 근처에도 접근하지 못한 허무맹랑한 기사를 첫 호 특집으로 싣는다고? 자못 비장했던 “비난받는 언론이 되겠다”는 선언이 힘을 잃었다. 기대감이 너무 컸는지 배신감까지 느껴졌다. ‘종이’ 매체임을 강조한 주간지이기에 더 아쉬움이 크게 남았다. 홍석만 편집장은 미디어스와의 인터뷰[2]에서 끝끝내 “왜 종이인가?”에 대한 명쾌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그는 «젖은잡지»나 «악스트»를 성공 사례로 들며 종이 매체에 주목했다고 했다. «워커스»가 더 위태롭게 보였다. «워커스»는 오래 갈 수 있을까?


[1]다만 각 디자인팀의 특징이 드러나지 않는 것이 아쉬웠다. 1호를 맡은 ‘일상의실천’ 스타일이 가장 강하게 느껴졌다. 다른 팀의 변주는 너무 소극적이라 오히려 잡지의 일관성을 망치는 것처럼 보였다. 나쁜 디자인은 아니었다. 이 정도도 감지덕지라고 넘길 수도 있지만 각 팀의 성격까지 드러났다면 이 주간지가 갖는 의미가 더 풍성해졌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들었다.
[2] 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53584
http://www.newscham.net/workers/

# 독립출판 by @sceneryoftoday
2016.02.16
텍스트 지도를 내 삶에 동기화하기

2016년 2월 16일 «인덱스카드 인덱스»(동신사, 2015)에 대한 안은별의 서평 ‹읽었던 시간에 공간적 질서를 부여하기›가 발표됐다. 나는 그것을 읽고 나의 인덱스카드에 ‘동기화’와 ‘지도’라는 단어를 추가했다. «인덱스카드 인덱스»에서 둘을 찾아보면 ‘동기화’는 나오지 않지만 ‘지도’는 52쪽의 “손으로 그린 지도 701”, 71쪽의 “인쇄 지도 701”, 82쪽의 “중세의 지도 제작 537”로 나타난다. 이는 ‘손으로 그린 지도’와 ‘인쇄 지도’, ‘중세의 지도 제작’이라는 단어 또는 그와 관련된 글이 김동신의 인덱스카드 701번과 537번에 각각 적혀 있다는 뜻이다. 김동신의 701번 카드와 537번 카드가 정확히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표제어를 토대로 그것을 추측해 보는 것은 가능하다. 701번 카드는 손으로 그린 지도와 인쇄 지도의 차이를, 혹은 인쇄기가 지도를 그리는 손을 대체하는 시기를, 혹은 구글 지도를 다루고 있는지도 모른다. 537번 카드는 701번 카드와 사실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것들이 어떤 지형의 일부일지 그려보는 것. 내가 이해한바 (혹은 박성용이 ‹묶이지 않은 종이 뭉치에 글을 쓰기›를 통해 말하는바) 인덱스카드는 일종의 대화용 도구인데, ‘텍스트’-‘읽는 나’-‘쓰는 나’-‘텍스트’ 사이사이에서 끊임없이 상호 간의 대화를 끌어내기 때문이다. 이러한 대화는 당연하게도 인덱스카드와 인덱스카드 사이에서도 이루어지며, 말하자면 이 글은 ‘지도’를 표제어로 하는 인덱스카드를 매개로 스치듯 일어나는 짧은 대화인 것이다.


https://twitter.com/dongshinsa/status/699605873929252864

# 독립출판 by @modusleep